[요약내용] ● 논리학상의 개념은, 그것이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는 관념이면서도, |
〓▣[제목]▣〓
● 개념
○
〓♣본문♣〓
이어서 개념을 살피게 된다.
● 논리학에서 말하는 개념
///
논리학에서 말하는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관념과는 조금 의미 차이가 있다.
논리학자도 심리적으로 관념을 얻고 그 관념으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심리상의 관념과 논리학에서의 개념을 구별하고자 한다.
즉 시간 공간적으로 변화하고 각 주체마다 조금씩 다르고,
한 개인에게서도 시시각각 다른 내용으로 얻는 관념과는 구별하여
고정 불변되어 동일성을 갖는 '논리학 상'의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리적인 개념은 존재를 지시하는 의미체로서 고정화되는 때에 벌써 논리적 동일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일반 개념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비록 단독적 개별적인 개념에 있어서도 개념으로 고정되는 동시에
벌써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러면서도 다시
"존재는 개념에 의하여 지시되고, 개념은 명사(名辭, 단어,TERM)에 의하여 대표된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개념의 내용은 사실상 심리적인 관념과 거의 같은 내용이며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의 관계를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즉
논리학상의 존재-> 개념 ->단어는
실생활에서의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의
관계와 대응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논리학의 추리의 전개와 그를 통한 결론의 참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번 사용되는 개념이 계속 동일한 내용으로 고정되어야 함이 필요하고 요구된다.
따라서 개념이란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관념' 일 뿐이다.
즉 개념은 그런 요구를 충족하는 관념으로서 정의하여 논리학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논리적 추론과정에서 한 번 사용된 개념이
각 문장이나 논리 추론 전개과정에서 매번 다른 의미를 갖는다면
추리에 사용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과연 그런 개념이 우리 정신이나 타인의 정신에 실존하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 사람의 관념은 시시각각 다른 내용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나 어른이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갖더라도
그 구체적 내용은 매 자동차를 보고 대할 때마다, 경험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이 첨가되고
빠지고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관계를 정리하면
예를 들어 우리는
자동차를 감각하고 -> 그것에 대해 다시 관념을 얻고
-> 이를 바탕으로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각각의 의미와 관계가 매번 조금씩 다른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도 사실은 이런 사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러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관념을 추론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고정된, 존재 -> 개념 -> 단어 라는 관계를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전제는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존재 -> 개념 -> 단어의 관계에서
존재로 파악하는 내용이 실재내용인가,
아니면 감각내용인가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책상이나 자동차를 본다.
그러나 우리가 얻는 내용은 사실은 존재의 실재내용이 아니다.
단지 마음으로 감각한 내용물이다.
그래서 여기서 존재를 실재내용으로 이해하는가, 감각내용으로 이해하고 제시한 것인가가
먼저 문제된다.
실재내용 -> 마음에서 감각한 감각 내용물 , 관념내용 -> 언어내용의 관계를 예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먼저 정할 필요가 있다.
● 두번째 우리는 추론의 엄격성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의 고정성 동일성을 말하고 요구하지만
이는 실증되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생활에서도 그리고 실제 추론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은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학에서는 이런 내용을 주장하고
이런 내용으로 '개념'이란 관념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 만큼 현실과 분리된 허구적인 논리 추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논리 추론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모두 같은 --동일한 개념-을 대표하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논리 추론이 올바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는 못하다.
어느 부분이 잘못인가.
물론 엄격한 논리의 잣대에서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언어나 현실 생활에서의 정신작용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가 무엇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가 하면
이렇게 문제가 많은 언어나 현실 생활에서의 정신작용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논리학은 논리학에서 요구하는 동일성의 요구가 지켜지지 못하면,
현실에서 행하는 추론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밝혀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현실에서 행하는 정신작용이 논리학의 요구에 의해 바꿔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논리학에서 한 개념이 늘 동일한 내용으로 정해져 추론과정에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고 해서,
실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추론할 수 있게 바뀌지는 않는다.
때문에, 논리학이 이 현실에 적응해야지,
실현되지 않는 요구를 주장하면서 학문을 성립시키는 것은 의미가 적다.
논리학이 논리학 자체를 위한 논리학이 아니라,
현실의 진리판단에 의미를 갖는 논리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논리학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가정을 전제로 하여 출발시키고 종결하고만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 사용할 수 없는 논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점이 논리학의 문제의 하나인 것이다.
● 한편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면
심리적으로 얻는 관념이 갖는 문제점을 모두 함께 갖는다.
- 우선 개념을 두 주체 이상이 서로 함께 공유하고 서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개인은 다른 타인이 어떤 개념(관념)을 그 자신의 내부에서 형성해 갖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 내용을 직접 아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 또 언어는 물론 그 두 주체가 서로 소통하고 교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언어가 각 개인 내부에서 어떤 개념과 결합되어 사용된 것인지를 밝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 한편 개념이 감각내용과 관련해 형성된 경우,
어떤 개념이 어떤 감각내용과 상응하여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모호하다.
불에 대해 감각내용을 얻고, 불이라는 관념도 얻지만,
그 상황에서 엉뚱하게 '물'이란 관념도 얻을 수있고 '불자동차'라는 관념을 연상해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은 수많은 관념이 이와 상응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많은 관념들 가운데,
어떤 관념을 그 감각내용과 들어 맞어 옳은 것이고
어떤 관념은 들어맞지 않아 옳지 않다고 할 때
그렇게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이 무엇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논리학과 현실을 이어주는 교두보를 건설하는 문제라고 보게 된다.
즉 관념적으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추론이
현실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연결고리다.
각 관념과 그를 통한 추론이 현실과 관계되어야 그 추론은 의미있다.
그 과정에서 각 관념은 정확히 어떤 감각내용이나 사실들과 관계를 갖는가가 문제된다.
즉 '불'은 정확히 무엇( 어떤 감각내용, 또는 실재내용) 을 가리킬 때 옳은 것인가.
또 어떤 상황이나 상태는 정확히 어떤 개념으로 표현될 때 옳은 것인가..
라는 문제가 여기에 개입된다.
그래야 현실과 논리가 서로 긴밀하게 관련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논리학의 진리 문제가 공허한 논리가 아니라,
현실의 진리 문제와 곧바로 관련되기 위해 필요한 교두보라는 의미다.
● 또 하나의 문제는 관념이 본래 갖는 기본적 한계성이다.
관념은
타인과 정확이 그 관념 (개념) 자체를 서로 주고 받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
한 주체 내부에서도 그 관념(개념)은 불확실한 기억-재생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관념은 늘 현재 시간에 맺힌다. 과거의 관념은 현재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 다른 시간에 얻게 되는 개념의 동일성을 확보할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잘못 기억된 내용, 기억나지 않는 내용들에서 이들이 특히 문제된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과거에 학습한 내용을 잘못 재생해내는 경우와 같다.
그 학생은 자신이 적은 답이 과거의 그 관념이라고 믿지만, 정답은 아닌 경우가 많다.
이처럼 대부분 과거의 관념과 현재의 관념이 동일하다고 믿지만,
이 경우에서도, 과거의 관념과 현재의 관념의 동일성의 근거에 대해서 이론상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과연 지금 떠오르는 이 관념은 자신이 가리키고자 하는 과거 (오래전에 ) 그 관념과 동일한 것인가..
동일하다면 그것을 확인하거나 보증할 근거는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등이 문제되는 것이다.
● 또 한편, 한 개념은 감각내용과도 관련되고 다시 언어내용 즉 표현과도 관련된다.
쉽게 말하면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 본 내용을 생각하고 -> 생각한 내용을 말이나 글로 표현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간의 대응관계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문제삼을 때는
또 감각내용과 언어내용 각각의 동일성이 문제된다.
○ 그런데 감각내용은 관념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일으킨다.
관념이 두 주체사이에 직접 교류 전달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은 또 다른 주체와 직접 교류할 수 없다.
관념은 불완전하나마 기억-재생과정을 통해 과거의 관념이 현재 시점에 재생 유지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감각내용은 그런 재생과정조차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매순간 그 순간 순간 새로운 감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감각내용을 현재에 다시 재생해 얻는 것이 사실상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동일성 유무도 역시 판단 곤란하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
한편 감각 - 개념 - 언어의 관계에서 이들 각각이 서로 어떤 내용으로 대응해야 옳은가가 문제된다.
앞에서 감각내용과 개념과의 관계를 보았지만,
그런데 이 문제는 언어와의 관계에서도 문제된다.
한편 언어는 다시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으로 환원되게 된다.
언어는 본질상 관념내용과 감각내용의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언어는 말소리 자체(감각내용)이거나 말소리를 통해 얻는 관념(관념내용)이거나 한 것이다.
언어로 표시하는 글자나 말이나 모두 감각내용으로 1차적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엄격하게 보면 감각- 개념 - 언어(감각내용) - 언어 (관념내용 )
들의 상호 일치 대응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각각에 역시 앞에서 본 이런 기본적인 한계와 문제가 있다.
○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감각을 하고 - 관념을 얻고 - 판단을 하고 살아가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진리 참이라고 믿게 되는데
그 과정에 논리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필요가 있다.
또 여기에는 현실의 바탕을 이루는 실재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관련된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진리판단의 기초가 되어주기 위해서
논리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이 현실과 떨어져서 자신의 독창적인 전제를 마구 요구하는 것은
논리학의 자체로서는 학문의 엄격성을 유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지만,
현실과의 관계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 요구가 현실에서는 사실상 충족되지 않는데,
이론상으로만 그런 요구를 하고 또 충족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런 바탕에서 추론을 전개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확보되지 않는 동일성이 마치 늘 유지된다고 가정하고,
그런 요구를 충족하는 개념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런 개념을 사용하여 논리 추론을 하고
그런 가운데 이것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논리학만의 지적 유희나 게임으로 끝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만큼 변화하는 관념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논리학이 현실에 의미를 가지려면
앞에 나열한 여러 이론상 문제점이 현실에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나 참으로 믿는 내용을 논리적으로 어떻게 건설하고,
형성해 가질 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 즉
○ 동일성이 확보되지 않는 전후의 개념, 감각내용,
○ 타인이나 전후의 자신안에서도 서로 교류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개념, 감각내용
○ 그리고 엄밀히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감각내용-개념- 언어 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토대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진리나 참인 판단을 끌어내고 형성하는가..
엄격히 보아 논리학에서 요구하는 그런 많은 전제적 요구(동일성이나 상호 교류 등)는
사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내용을 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슨 전제에서 그것을 참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확보해야 한다.
○ 사실상 개념의 문제는 논의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이런 논의를 전제로 해야
그 논리학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고 서로 함께 내용이 형성되어 갈 수 있다고 본다.
논리학은 공허한 논리학 상의 기초위에서 지적 유희를 일삼기 위해 행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논리학은 현실의 진리문제에 판단 기준이 되어줘야 한다.
그래서 앞과 같은 한계가 있지만,
현실에서 행하는 많은 진리판단이
어떤 점에서 유용하고 적절한 것인가를
밝혀 주는 논리학이 필요한 것이다.
불과 물에 대해서 우리가 논리학을 적용해 추론을 할 때
그 불과 물이 우리에게 화상을 주거나, 시원함을 준다고 할 때
바로 이런 현실 부분에 논리학의 추론과 그 결론이 와 닿는 논리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성자]™ Tok kum
◑[작성일]◐ 2011-12-23-01-04
♨[수정내역]♨ 2012-08-수-08-19-54 표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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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 kum 2011/12/23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UN님이 읽어 보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해서,,
저 역시 다시 읽어보니,,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조금 새로 다듬었습니다..
공허한 관념적 추리에 논리학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재미있기는 한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합니다.
지적 유희로서의 논리와,
현실에서 이용가능하고 의미를 주는 논리학의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현실에서 논리학이 보다 많은 의미를 가지려면,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언어내용->개념->감각내용-> 실재내용,,,의 상호관계를 밝히는데에서
그 토대가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un Tokyun 2011/12/23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각내용을 현실에서 재생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예를 들어 아침에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다. 저녁에 커피나 담배가 생각나면, 눈을 감고 아침의 커피나 담배를 떠올린다...아침에 마신 커피와 그 때 느낀 모든 감각들이 똑같이 재생된다.
...웃... 기호식품들인 경우에는 이런 재생만으로 충분할 텐데요,
그리고 그랬다면 LAB님이 폐암이나 위암 등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혹시 최면을 하면 과거가 그대로 떠오른다는데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이런 감각내용이 아닐까요,,
그것도 정밀한 관념들인가요?
그나저나 참 골아픈 부분을 논의하시는 것같습니다. 읽으면서 무슨 말씀을 지금 하시는 건지 많이 헤맸습니다.
논리학에서 기본적인 전제나 공리로 제시하는 부분에 문제가 많다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런 어려운 문제가 많다면서 앞으로 논의를 계속 하실 수는 있는 건지 아리송합니당..
기대~~
Tok kum 2012/01/02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면은 관념을 불러 넣어 관념을 재생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우리의 신체반응도 일일이 표면의식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말초신경과 반응과정 사이에는 직접 감각이 개입해서 이뤄진다기 보다는 관념작용이 개입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최면에 의해 관념을 대치해 넣으면 그에 따른 신체반응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정신작용의 분석은 그 정신작용을 직접 관찰자가 외부로 꺼내 확인할 수 없기에,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해 행할 때에도, 관찰과 관찰대상이 되는 정신작용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정신작용에 대한 연구는 본질적인 어려움과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관찰 대상이 되는 정신작용을 스스로 반복함을 통해 그 내용을 음미할 수 있고,
보다 심화된 정신 수행,,예를 들어 명상이나 참선등이 이런 분석을 좀 더 깊게 진행할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 대부분 글들을 비공개처리하는데 현재 진행 중인 연구부분은 공개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은 공개로 돌립니다.
이전에 쓴 중론 논의도 사실상 용수아저씨와 저작물 이용 계약이 오래 전에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내용으로 이해하는데,
그러나 그 번역물은 또 다른 문제라고 하는군요..
그렇다고 일일이 새로 번역을 해서 내용을 대채해 넣기도 그렇고
아예 학술논문처럼 형태를 바꾸어서 정식으로 올려 놓던지 해야 할 텐데,
여하튼 이 작업은 시간이 걸리니, 먼 후일로 미룹니다.
다만 지금 논의하는 논리학은 그런 작업에도 기초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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